[이글 홀든] 편지
2016. 6. 23. 21:34ㆍ사이퍼즈
다수의 사망소재 주의.
전쟁이 끝났다.
붉은 화염이 타오르고, 푸른 물방울이 쏟아지고, 서늘한 어둠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전쟁은 끝났다.
언 땅이 다시 녹는 일은 없었다.
------------------------------------
작은 형에게.
안녕, 작은 형? 그동안 잘 지냈어? 하기야 거긴 뭐 별 일 없겠지? 난 좀 바빴어. 여기저기 뒤처리를 하고 다니느라 말이야. 형도 알겠지만 전쟁이 끝났잖아. 아니지. 알긴 하려나 모르겠네. 대체 어디 틀어박혔길래 세 달이 넘도록 코빼기 하나 안 비추는거야? 다이무스 형이 걱정하고 있어. 업신여보다가 3급 결정사한테 졌을 때 처럼 된 거 아니냐고 말이야. 난 그런 걱정 안 해. 설마 작은 형이 두 번이나 그럴 리가 없잖아. 아. 뭐. 물론 형이 가면 쓴 녀석에게 검을 겨눴던 건 알아. 하지만 그런 녀석을 상대로 방심할 형이 아니잖아. 무슨 말이 하고싶은건지 모르겠다고?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쓰고 있나 몰라.
그러게 대체 거기서 왜 그런 녀석을 상대했어? 성치도 않은 몸이었다며. 안 봐도 뻔하네. 그 되도 않는 자존심 때문에 형이 하겠다고 했겠지. 잘 됐네. 형 덕분에 리사는 살았어. 지금도 멀쩡해. 밥도 안 먹고 밤낮 울며불며 방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있긴 한데, 죽는 것 보다야 낫지.
나 말이야. 괜히 마을로 갔었나봐. 형이랑 같이 수도원에서 강화인간을 상대했다면 좋았을텐데. 그랬으면 눈 앞에서 나이오비가 폭주하는건 안 봐도 됐을 것 아냐. 누가 알았겠어? 죽은 줄 알았던 에밀리아가 멀쩡히 살아서 안타리우스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줄. 샬럿이랑 마를렌이 아무리 물을 부어대도 그 불은 꺼지질 않더라. 진짜 끔찍했어. 자기 능력에 삼켜지는 동료같은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거든.
형. 그 불 말이야. 안 사라지더라. 꺼지지도 않는 그 불이 주인을 잃고서는 미친듯이 타오르는데 그대로 뒀다가는 그 일대를 다 집어삼킬 것 같았어. 토마스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불에 타 죽었을거야. 영웅이지. 영웅 토마스. 그 전의 녀석은 전설이 됐고. 아, 형은 모르겠구나. 3년 전에 형에게 굴욕을 선사해줬던 우리 영웅님 말인데, 이젠 전설이 됐어. 끝없이 번져가는 화마속에서 애들을 하나씩 안아서 전부 구해냈거든. 정작 본인은 불타버린 동료의 곁을 지켰지만.
참. 그 애 기억해? 그 왜, 털 달린 옷을 입은 조그맣고 귀여운 애 있었잖아. 연합의 귀염둥이. 내가 엄청 귀여워한다던. 뭐? 무슨 소리야. 걔는 안 죽었어. 나비 언니는 어디 갔냐면서 뒤집어지긴 했지만 삼사일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근데 뭐라더라... 피터가 그러는데, 전부 찾아오겠다고 했대. 엄마아빠랑 나비 언니랑 루이스 오빠랑, 다른 언니오빠들도 다... 다 찾아오겠다고. 그리곤 눈 앞에서 사라졌대. 끼고 있던 장갑 한 짝만 남기고. 그 이후로는 형처럼 행방불ㅁ 아니, 아니야. 그럴리가. 어, 통 보이질 않아. 대체 어디까지 놀러나간건지 모르겠네. 얼른 좀 왔으면 좋겠는데. 마를렌이 엘리가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사다줬는데 이제 이틀 뒤면 유통기한이 지나버리거든.
...형. 나 연합에서 나갈까봐. 왜냐고?
다 나만 보면 뭐라고 하잖아. 어젠 앤지도 날
들들 볶더라니까. 왜들 나만 가지고 그럴까.
살아있는게 기적인 전쟁이었잖아. 안 그래?
아, 다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있잖아, 작은 형.
지금이라도 집에 좀 돌아 와.
응? 한나 유모가 걱정한단 말이야.
------------------------------------
탁. 이글은 펜을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는다.
"하, 못해먹겠네."
삐걱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는다. 벨져와 아이작, 나이오비와 에밀리아, 타오르던 화염, 전설 루이스, 영웅 토마스, 사라져버린 엘리... 머리 속이 복잡하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본다. 하늘이 어둡다. 괜히 옆구리의 흉터가 아려온다. 젠장. 그 의사 녀석만 있었어도.
4차 능력자 전쟁 때문에 사망한 사이퍼는 한둘이 아니었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부상을 치료하지 못해 죽은 능력자가 태반이었다. 가장 뛰어난 치유 능력을 가진 까미유 데샹은 안타리우스의 1순위 제거대상으로 지목되어 전쟁 발발 이틀만에 반딧불 교향곡 속에서 쓰러져버렸고, 이에 다른 치유 능력자들은 겁을 먹고 전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안타리우스가 완전히 무너진 지금도 뭐가 그리 두려운지 꼭꼭 숨어버려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었다. 비능력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려 해도 앤트워프 조약 위반을 문제삼은 영국 정부의 성명 발표와 국제 사회의 능력자 멸시 풍조가 겹쳐 진료 거부가 일상인 상황이었고. 이글은 가문의 인맥으로 간신히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상처는 곪을대로 곪은 후였다. 홀든가의 삼남인 이글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안 봐도 뻔했다. 전쟁이 끝난지가 벌써 세 달 째였는데, 아직도 그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이었다.
"아주 죽을 둥 살 둥 버텼구만. 다들."
그래. 다들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글도 그랬다. 눈 앞까지 다가온 제키엘을 보고 든 생각은 단 하나. 아, 죽겠구나. 샬럿이 급히 그려 준 비구름이 아니었다면 이글은 옆구리가 아니라 머리에 구멍이 났을 터 였다. 그런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옆구리면 또 모를까, 머리 흉터라니. 전혀 멋있지 않았다. 흉터 이전에 죽을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잠깐 들지만 애써 무시하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과자 뭉치에 시선이 닿는다.
"...아. 저건 또 어쩐대냐."
두 달 전이었다. 마를렌이 과자를 들고 연합을 찾았던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이글에게 과자 뭉치를 떠넘기고는 평소의 당찬 목소리를 억지로 흉내내며 '절대 아저씨가 먹지 말고, 엘리가 돌아오면 꼭 전해주세요. 꼭이에요. 하나라도 뺏어먹었다는 얘기가 들리면 발리스타를 정수리에 맞춰줄거에요.'라고 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가던 마를렌.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멈춰서더니 끝내 주저앉아 눈물을 닦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 엘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피터 이후로 그 누구도 엘리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건데, 꼬맹아."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여섯살 난 어린아이.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찾으러 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 부디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하. 더 이상 생각을 말아야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기가 무섭게 우르릉 쾅. 천둥이 친다. 아무래도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려는 듯 싶다.
전쟁이 끝났다.
붉은 화염이 타오르고, 푸른 물방울이 쏟아지고, 서늘한 어둠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전쟁은 끝났다.
언 땅이 다시 녹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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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에게.
안녕, 작은 형? 그동안 잘 지냈어? 하기야 거긴 뭐 별 일 없겠지? 난 좀 바빴어. 여기저기 뒤처리를 하고 다니느라 말이야. 형도 알겠지만 전쟁이 끝났잖아. 아니지. 알긴 하려나 모르겠네. 대체 어디 틀어박혔길래 세 달이 넘도록 코빼기 하나 안 비추는거야? 다이무스 형이 걱정하고 있어. 업신여보다가 3급 결정사한테 졌을 때 처럼 된 거 아니냐고 말이야. 난 그런 걱정 안 해. 설마 작은 형이 두 번이나 그럴 리가 없잖아. 아. 뭐. 물론 형이 가면 쓴 녀석에게 검을 겨눴던 건 알아. 하지만 그런 녀석을 상대로 방심할 형이 아니잖아. 무슨 말이 하고싶은건지 모르겠다고?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쓰고 있나 몰라.
그러게 대체 거기서 왜 그런 녀석을 상대했어? 성치도 않은 몸이었다며. 안 봐도 뻔하네. 그 되도 않는 자존심 때문에 형이 하겠다고 했겠지. 잘 됐네. 형 덕분에 리사는 살았어. 지금도 멀쩡해. 밥도 안 먹고 밤낮 울며불며 방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있긴 한데, 죽는 것 보다야 낫지.
나 말이야. 괜히 마을로 갔었나봐. 형이랑 같이 수도원에서 강화인간을 상대했다면 좋았을텐데. 그랬으면 눈 앞에서 나이오비가 폭주하는건 안 봐도 됐을 것 아냐. 누가 알았겠어? 죽은 줄 알았던 에밀리아가 멀쩡히 살아서 안타리우스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줄. 샬럿이랑 마를렌이 아무리 물을 부어대도 그 불은 꺼지질 않더라. 진짜 끔찍했어. 자기 능력에 삼켜지는 동료같은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거든.
형. 그 불 말이야. 안 사라지더라. 꺼지지도 않는 그 불이 주인을 잃고서는 미친듯이 타오르는데 그대로 뒀다가는 그 일대를 다 집어삼킬 것 같았어. 토마스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불에 타 죽었을거야. 영웅이지. 영웅 토마스. 그 전의 녀석은 전설이 됐고. 아, 형은 모르겠구나. 3년 전에 형에게 굴욕을 선사해줬던 우리 영웅님 말인데, 이젠 전설이 됐어. 끝없이 번져가는 화마속에서 애들을 하나씩 안아서 전부 구해냈거든. 정작 본인은 불타버린 동료의 곁을 지켰지만.
참. 그 애 기억해? 그 왜, 털 달린 옷을 입은 조그맣고 귀여운 애 있었잖아. 연합의 귀염둥이. 내가 엄청 귀여워한다던. 뭐? 무슨 소리야. 걔는 안 죽었어. 나비 언니는 어디 갔냐면서 뒤집어지긴 했지만 삼사일 지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근데 뭐라더라... 피터가 그러는데, 전부 찾아오겠다고 했대. 엄마아빠랑 나비 언니랑 루이스 오빠랑, 다른 언니오빠들도 다... 다 찾아오겠다고. 그리곤 눈 앞에서 사라졌대. 끼고 있던 장갑 한 짝만 남기고. 그 이후로는 형처럼 행방불ㅁ 아니, 아니야. 그럴리가. 어, 통 보이질 않아. 대체 어디까지 놀러나간건지 모르겠네. 얼른 좀 왔으면 좋겠는데. 마를렌이 엘리가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사다줬는데 이제 이틀 뒤면 유통기한이 지나버리거든.
...형. 나 연합에서 나갈까봐. 왜냐고?
다 나만 보면 뭐라고 하잖아. 어젠 앤지도 날
들들 볶더라니까. 왜들 나만 가지고 그럴까.
살아있는게 기적인 전쟁이었잖아. 안 그래?
아, 다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있잖아, 작은 형.
지금이라도 집에 좀 돌아 와.
응? 한나 유모가 걱정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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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이글은 펜을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는다.
"하, 못해먹겠네."
삐걱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는다. 벨져와 아이작, 나이오비와 에밀리아, 타오르던 화염, 전설 루이스, 영웅 토마스, 사라져버린 엘리... 머리 속이 복잡하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본다. 하늘이 어둡다. 괜히 옆구리의 흉터가 아려온다. 젠장. 그 의사 녀석만 있었어도.
4차 능력자 전쟁 때문에 사망한 사이퍼는 한둘이 아니었다.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부상을 치료하지 못해 죽은 능력자가 태반이었다. 가장 뛰어난 치유 능력을 가진 까미유 데샹은 안타리우스의 1순위 제거대상으로 지목되어 전쟁 발발 이틀만에 반딧불 교향곡 속에서 쓰러져버렸고, 이에 다른 치유 능력자들은 겁을 먹고 전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안타리우스가 완전히 무너진 지금도 뭐가 그리 두려운지 꼭꼭 숨어버려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었다. 비능력자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으려 해도 앤트워프 조약 위반을 문제삼은 영국 정부의 성명 발표와 국제 사회의 능력자 멸시 풍조가 겹쳐 진료 거부가 일상인 상황이었고. 이글은 가문의 인맥으로 간신히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상처는 곪을대로 곪은 후였다. 홀든가의 삼남인 이글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안 봐도 뻔했다. 전쟁이 끝난지가 벌써 세 달 째였는데, 아직도 그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있을 지경이었다.
"아주 죽을 둥 살 둥 버텼구만. 다들."
그래. 다들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글도 그랬다. 눈 앞까지 다가온 제키엘을 보고 든 생각은 단 하나. 아, 죽겠구나. 샬럿이 급히 그려 준 비구름이 아니었다면 이글은 옆구리가 아니라 머리에 구멍이 났을 터 였다. 그런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옆구리면 또 모를까, 머리 흉터라니. 전혀 멋있지 않았다. 흉터 이전에 죽을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잠깐 들지만 애써 무시하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창 밖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과자 뭉치에 시선이 닿는다.
"...아. 저건 또 어쩐대냐."
두 달 전이었다. 마를렌이 과자를 들고 연합을 찾았던건.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이글에게 과자 뭉치를 떠넘기고는 평소의 당찬 목소리를 억지로 흉내내며 '절대 아저씨가 먹지 말고, 엘리가 돌아오면 꼭 전해주세요. 꼭이에요. 하나라도 뺏어먹었다는 얘기가 들리면 발리스타를 정수리에 맞춰줄거에요.'라고 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가던 마를렌.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멈춰서더니 끝내 주저앉아 눈물을 닦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 엘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피터 이후로 그 누구도 엘리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건데, 꼬맹아."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여섯살 난 어린아이.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찾으러 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 부디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하. 더 이상 생각을 말아야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기가 무섭게 우르릉 쾅. 천둥이 친다. 아무래도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려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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